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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호랑이의 먹이가 된 김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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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호랑이의 먹이가 된 김처선



김처선

 ]
유형인물
시대조선
출생 - 사망미상 ~ 1505년(연산군 11)
성격환관
성별
본관전의(,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대표관직(경력)자헌대부


김처선은 조선 전기의 환관으로 여러 왕을 시종하였습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나 세조의 미움을 받아 자주 장형(杖刑)을 당하였는데요. 그러다가 성종 때 대비의 병을 극진히 간호하던 차에 대비의 병이 완쾌되자 성종이 정2품 자헌대부 직급을 내리면서 본격적인 출셋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성종이 승하하자 연산군은 3년 상을 담당하는 직위에 김처선을 임명하게 되는데요. 당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앞에서 3년간 시묘막살이를 해야 했으나 임금이 3년 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기에 신임하는 신하에게 대신 3년간 시묘막살이를 시키게 됩니다. 이 임무를 마친 후 김처선은 연산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정사를 어지럽힘을 항상 성심껏 간하고 직언을 잘하면서 미움을 받게 됩니다. 

연산군이 궁중에서 스스로 창안한 처용희(處容戯)를 베풀어 그 패악과 음란함이 극에 달하자, 김처선은 마침내 죽음을 각오하고 극간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늙은 신은 4왕조를 섬겨 대략 역사에는 통하는 바 고금의 군왕으로 이같이 문란한 군왕은 없었소이다."



연산군이 화를 이기지 못하여 화살을 당겨 쏘아 김처선의 옆구리를 꿰뚫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대신들도 죽음을 서슴치 않는데 이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다만 주상께서 오래 이 나라 주인이 못 되실 것이 한스럽소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화를 참지 못한 연산군은 다시 화살을 쏘아 그를 땅에 거꾸러뜨리고 다리를 자른 다음 걸으라 하니, 쳐다보며 

"주상께서는 다리가 잘리우고도 걸을 수 있소?" 라고 반문하였다고 하네요. 



마침내 이성을 잃은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자르고 몸소 배를 갈라 창자를 헤쳤으나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주검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이로 주었다고 하는데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연산군은 김처선의 재산을 몰수하고 집을 불태워 호수로 만들었으며, 그의 양자인 이공신(李公信)과 7촌까지도 연좌시켜 처형하고 본관인 전의도 없앴습니다. 

그리고 김처선의 부모의 무덤까지 헐어 버렸으며 모든 공식문서에서 '처' 자와 '선' 자를 빼도록 지시하였다고 하는데요.

이후 치뤄진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한 권발이 '처'자와 '선'자를 쓰지 말라는 지시를 어긴 이유로  급제가 취소되기도 하였고 연산군이 좋아하던 '처용무'도 '처' 자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처용무(處容舞)를 풍두무(豊豆舞)로 고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을 직감했으면서도 폭정을 일삼는 임금에게 충언을 한 김처선이야말로 조선 최고의 내시라 할 만한데요.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중종(1506) 때에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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